[보험談]은 보험업계의 숨은 이야기를 다루는 코너입니다. 보험상품 개발 비하인드스토리부터 각종 카더라 통신까지 보험업계 여러 담론(談論)과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 때로는 보험사들이 민감한 험담(險談)까지도 가감없이 전달한다는 중의적 의미를 담았습니다.
[한국공제보험신문=이재홍 기자] 고지 의무라는 게 있습니다. 소비자와 보험사 간 사적 계약에서 거의 유일(?)하게 소비자에게 요구되는 의무입니다. 어떤 보험에 가입하려고 할 때 과거의 병력이나 직업 등 중요한 사안들을 미리 말하도록 하는 거죠. 소비자는 보험사가 알았다면 계약을 거부하거나, 보장을 줄이거나, 혹은 보험료를 높일 수 있는 요소를 숨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소비자가 이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고지는 계약 전에 이뤄져야 하지만 분쟁은 보험금 청구 후에 일어나죠. 보험사고를 접수한 보험사는 조금이라도 수상한 정황이 보이면 철저한 조사에 들어갑니다. 기왕증 가능성, 위험한 직무 수행과의 연관성 등이 그것입니다.
이때 만약 소비자가 미리 알렸어야 할 중요한 사안을 숨겼다는 게 밝혀지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거나, 보험계약 자체가 무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당연하죠. 계약상 명시된 리스크를 보장하는 보험에서 계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숨겨진 위험요소까지 담보하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분쟁이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 국정감사에서도 거론됐죠. 국회 정무위원회 황운하 의원에 따르면 주요 보험사들이 고지 의무 위반을 이유로 보험금을 주지 않은 사례가 지난 2016년부터 5년 사이 3배 정도나 늘었다네요. 그것도 전부 부지급만요. 같은 사유로 보험금을 일부만 준 건에 대해서는 별도의 통계조차 없다고 합니다.
더 난감한 상황도 있습니다. 알려야 할 사항을 소비자가 일부러 속이거나 숨긴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소비자가 설계사에게 필요한 내용을 모두 고지했다면 말이죠. 질문에 솔직히 답하고 보험에 가입했는데, 오랜 기간 성실하게 보험료만 내다 정작 필요한 순간에 보험금은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요?
설계사에게 말했어도 소용없다는 건 또 왜일까요? 보험사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법적으로 설계사들에게는 고지를 수령할 권한이 없다’고요. 의아하지 않나요? 했지만, 수령 권한이 없는 이에게 한 것이라 결국은 하지 않은 것과 같다. 글로 풀어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보험에서는 보험사에도 엄격한 의무들이 주어집니다. 중요한 사항을 빠짐없이 상세하게, 그러면서도 명확하게 안내하라는 건데요. 소비자의 고지 의무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보험사의 설명 의무와 상충했을 땐 소비자의 편을 들어주는 게 보편의 판례입니다.
그런데 보험사들은 이렇게 중요한 의무 대부분을 설계사에게 위임합니다. 소비자가 알아야 할, 보험사가 알려야 할 주요 내용은 설계사가 안내하죠. 보상하는 손해와 보상하지 않는 손해, 가입자 주의사항, 고지 의무에 관한 것도요. 혹여 설계사가 중요한 내용을 설명하지 않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보험사의 손해)에 대비하고자 녹취까지 하도록 하면서요. 그럼 소비자의 고지도 설계사를 통해 할 수 있다면 편하지 않을까요? 정 불안하다면 보험사의 설명 의무처럼 해당 내용을 녹취로 남겨도 좋고요.
사실 설계사에게 필요한 내용을 고지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은 계속 제기돼 왔습니다. 법적 권한이 없다는 게 이유라면 법을 개정하면 되니까요. 물론 법 개정이란 게 그렇게 쉬운 건 아니지만, 이 사안은 워낙 분쟁이 많고 그에 따른 소비자 피해도 크다 보니 이해관계자 간 협의만 된다면 어려울 것도 없다는 의견이 많았죠.
그때마다 보험사들은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실적을 올려야 하는 설계사가 고의로 보험 가입이 거절될 만한 고지 내용을 감출 수 있다’, ‘병력으로 보험 가입이 어려운 소비자와 설계사 간 공모 등 모럴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논리로요. 또 한 번 의아한 대목입니다. 분쟁과 소비자 피해는 현재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는 문제인데, 그럴 수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과하잖아요?
그렇다면 반대의 가능성도 생각해봅니다. ‘설계사에게 간편하게 알려도 되도록 하면 고지 의무 위반 사유로 주지 않았던 보험금 지출이 늘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고지를 토대로 가입을 거절하면 보험사의 신계약 체결 실적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 어떻습니까?
다른 이야긴데, 보험사들도 간절히 바라는 사안이 여럿 있습니다. 일례로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를 들어봅니다.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병원 서류 제출을 전산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건데, 의료계의 반발로 막혀 있어요. 민감한 의료정보를 보험사가 악용할 수 있다는 게 반대의 이유죠.
보험사들은 답답함을 토로합니다. 불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소비자 편익도 높일 수 있는데 확실치 않은 부작용 가능성만 들며 반대한다는 거죠. 필요하다면 악용을 막을 수 있는 안전장치를 둘 수도 있다면서요. 그런데 이거 어째 고지 의무 논란과 비슷하지 않나요?
#보험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