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생협공제 허용됐지만, 공정위 비협조로 12년째 사업 중단
되살아난 불씨, ‘140만 조합원 공동행동’에 공정위-생협TF 구성
“생협공제 내년 시행 목표, 규제일변도 벗어나 생협공제 장점 봐주길”
[한국공제신문=박형재 기자] 생협 공제가 12년째 표류하고 있다. 2010년 생협법 개정으로 법적 근거가 마련됐으나 주무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의 반대로 멈춰선 것이다. 그러나 최근 꺼져가던 불씨가 되살아나는 분위기다. 생협 단체들이 ‘140만 조합원 공동행동’으로 힘을 모으자, 공정위가 이에 화답하며 생협공제 실무자TF가 구성되는 등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생협은 숙원사업이던 공제를 시작할 수 있을까? 아이쿱생협 김정희 회장을 만나 생협 공제 히스토리와 청사진을 들었다.
생협공제사업이 10년 넘게 지지부진합니다. 2010년 생협법 개정으로 법적 근거가 마련됐음에도 주무부처에서 시행령과 시행규칙 등을 마련하지 않아 사업이 중단됐습니다. 이에 대한 아이쿱생협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제가 생협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2009년부터입니다. 2010년 생협법 개정 당시 생협 전반에 관심이 많던 때라 개정안을 자세히 살펴보고, 앞으로 생협의 사업 범위가 크게 확장되겠구나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개정안에 따라 생협의 사업영역이 친환경 농산물 거래를 넘어 사회 전 분야로 가지를 뻗고, 소비자단체의 한계를 벗어나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공제 및 복리후생 활동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2021년 현재까지 생협공제사업은 첫 삽을 뜨지 못했습니다. 협동조합은 구성원들의 상부상조가 기본인 조직이고, 공제제도를 누구보다 잘 활용할 수 있는데 주무부처의 정책 지원이 늦어져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제라도 생협공제 논의가 재점화된 것은 다행입니다. 앞으로 전문가 협의, 공정위-생협 실무자 TF회의 등 의견 조율을 거쳐 내년 공제사업 시행을 목표로 노력하겠습니다.
아이쿱생협 등 5개 생협대표단은 최근 생협공제 시행을 목표로 ‘140만 생협 조합원 공동행동’에 들어갔습니다. 지난 9월부터 1인 시위, 청와대 국민청원, 국회 기자회견 및 포럼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는데, 올 하반기에 드라이브 거는 이유가 있나요?
내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입니다. 또한,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대선 공약으로 제시한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런 변화의 시기에 맞춰 수면 아래 있던 생협공제 논의를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선후보 공약사항에 생협공제 허용을 명시하는 등 지금이 생협공제를 추진하기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해 총회 등 내부 의사결정을 거쳐 다각도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공제 근거법 만들기가 매우 어렵고, 법안이 생기면 공제사업까진 일사천리입니다. 반면, 생협은 법안이 있음에도 공정위가 관리감독 기준을 만들지 않아 사업을 못하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인데, 공정위 반대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울러 그동안 공제사업 도입을 위한 생협 측 움직임은 어땠는지도 궁금합니다.
사실 외부에서는 생협공제가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저희 나름대로 물 밑에서 사업 시행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습니다.
2010년 3월 생협법 개정으로 법적 근거가 마련된 이후 2012년 ‘생협공제사업의 효용성 및 건전한 발전 방안’을 주제로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김동수 공정위원장과 6개 생협연합회 대표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고, 김 위원장으로부터 “생협공제사업을 조속히 시행하겠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2015년에는 ‘협동조합의 자생적 발전 과제’를 주제로 국회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홍대원 공정위 소비자정책과장이 생협공제사업 시행시 예상되는 부작용으로 ‘연합회 파산시 소비자 피해’, ‘공제사업 수익수단화’ 우려를 제기했고, 생협은 이를 불식하기 위해 소비자 피해 방지대책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2017년 2월, 공정위는 생협법 일부개정안을 일방적으로 입법 예고했습니다. 공정위는 생협공제사업이 잘못되면 소비자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사업요건, 내부통제, 처벌 기준 등을 모두 강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시민사회단체 등의 반대로 개정안이 무산됐지만 생협공제의 장점보다는 부작용에 초점을 둔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주무부처에서 생협공제로 인한 소비자 피해를 우려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는 생협 입장에선 요구사항이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이는 공정위가 관리하는 직접판매공제조합, 한국상조공제조합 등에 비해서도 과도한 수준입니다.
생협은 공정위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소비자 피해 방지, 재무건전성 유지, 안전한 상품설계 기준, 투명한 정보 공개 기준에 관한 세부 방안들을 이미 제시한 상황입니다. 예상치 못한 소비자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조합원 간 상호부조 목적에 충실한 생협공제 출범을 목표로 나아가겠습니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생협공제 지연에 대한 의원 질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달 5일 공정위를 상대로 한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생협공제에 대한 의원 질의가 있었습니다.
배진교 정의당 의원은 “생협공제사업은 입법이 되고 12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하위 법령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시행되지 않고 있다”며 “이는 국회 입법권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나쁜 사례로 올 연내에 생협공제가 시행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 달라”고 촉구했습니다.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공정위 서면질의를 통해 생협공제가 내년 시행 가능한지, 공정위에서 추진 중인 법·시행령·감독기준은 무엇인지 등을 문의하고 공정위로부터 “향후 전문가 T/F 운영 등을 통해 생협공제 시행 방안을 조속히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생협공제가 표류 중인 것은 이전 국감에서도 수차례 지적됐던 사안이고, 여러 국회의원들이 사업 추진에 힘을 싣는 만큼 앞으로 전향적인 변화가 기대됩니다.
▷관련기사: 생협공제 12년째 표류, 무엇이 문제일까?
공정위가 9월 30일 5개 생협대표단과 간담회를 갖고 ‘생협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생협법 개정을 통해 생협의 배당금 출자 전환과 회전출자 허용, 비조합원의 생협 조합사업 이용 허용 등 규제 완화 계획을 밝혔습니다. 이 같은 조치는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공정위 행보에 비하면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생협에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거나, 실무 협상 테이블을 마련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정위 활력제고방안을 보면, 생협 스스로 하는 것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협 활성화를 위한 구체적인 안들이 나왔다는 것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다만 가장 민감한 공제사업에 대한 내용이 확실히 들어가야 하는데, 명확한 표현이 없는 것은 아쉽습니다. 앞으로 공정위와 생협 관계자들이 TF회의에서 만나 서로의 의견을 듣고 입장차를 좁혀나가길 바랍니다.
생협 공제가 본격화되면 어떤 상품이 나올지도 관심사입니다. 다른 공제기관과 차별화 포인트는 무엇인지, 추후 출시 예정인 공제상품 모델은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세요.
생협에서 공제상품을 운영하는 것 자체가 다른 공제기관과 차별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협은 태생이 조합원들을 위한 조직인만큼, 상품 설계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평소 필요했던 보장을 직접 제안하고, 참여자에게 훨씬 더 많은 수익이 돌아가는 사업 구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보험에서 이야기하는 역선택이나 도덕적해이가 줄어듭니다. 평소 친밀한 생협 구성원들이 모여 상품을 설계하고, 사고의 위험성도 유사한 사람들끼리 스스로의 위험관리 상품을 만들기 때문에 모럴해저드 가능성이 낮습니다.
추후 출시할 공제상품은 친환경-건강에 초점을 맞춘 색다른 의료보장 프로그램을 검토 중입니다. 아이쿱생협은 친환경농산물 거래로 성장한 만큼, 이 분야에 다양한 전문성을 갖고 있습니다. 좋은 먹거리 뿐만 아니라 건강을 위한 치유프로그램 등을 운영 중인데 이를 강화하는 방향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지난 6월 아이쿱생협에서 출시한 생수 ‘기픈물’은 미세플라스틱 0% 제품입니다. 미세플라스틱 걱정 없는 지하 600m 해양심층수로 생산되며, 기존 플라스틱병 대신 종이팩에 물을 담아 플라스틱 용기의 생산·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량을 크게 줄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이쿱생협에서는 친환경농산물 거래에서 쌓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생산자와 상협의해 품질 업그레이드 제품을 출시하고 있습니다.
만일 생협공제 사업이 허용된다면, 기존 보험사들의 사업 방식인 ‘질병이 걸린 뒤 치료비 지원’이 아니라, 평소 건강한 것들을 먹고 일상에서 건강을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합니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질병 치료비 지원에서 질병 예방에 중점을 두는 것이죠. 암환자나 만성질환자 전용 프로그램도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 여러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사람을 살리고 땅을 살리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다만, 이런 게 가능하려면 생협공제가 우선 시행돼야겠죠.(웃음) 앞으로 갈 길이 멉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공제(共濟)’는 생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상부상조 정신으로 움직이는 경제적 공동 보장제도입니다.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다양한 협동조합들이 필요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겨났고, 공제를 통해 조합원 이익은 물론 사회·경제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예컨대 스페인 ‘라군 아로’는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이 노동자가 아닌 자영업자로 분류되면서 사회보장제도에서 제외되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조직입니다. 협동조합에서 지역 노동자 의료보험과 산재보험, 국민연금과 실업급여까지 담당하며 지역 사회에 없어서는 안될 조직으로 성장했습니다.
일본의 생협은 1980년대에 코프공제를 통해 어린이와 주부 조합원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했습니다. 자녀가 놀이터에서 다치거나, 주부가 가사노동 중 다쳤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 없었는데, 월 900엔으로 치료비를 보장하는 공제상품을 만들어 스스로의 위험을 관리했습니다. 자산운용을 통해 잉여금이 생기면 조합원에게 환원하는 방식으로 호평받았습니다.
한국 생협도 이제 공제사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친환경 농산물 등 안전한 식품 공급에서 시작된 생협 조합원의 요구는 이제 공제상품을 통해 생활 속 위험에 대비하고, 건강활동 및 질병예방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다양한 사업으로 확장되길 원합니다. 조합원 눈높이에 맞는 상호부조 시스템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며, 조합원 맞춤형 공제를 스스로 운영하겠다는 의지도 강한 상황입니다.
공제는 생협이 친환경 농산물 유통에 국한됐다는 세간의 인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업으로 확장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소비자에게 더 좋은 상품을 공급하려는 생협과 생산자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미세플라스틱 0% 상품을 만든 것처럼, 생협공제가 허용되면 조합원 위험관리는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생협만의 운영 노하우를 발휘해 친환경적인, 공익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