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타령에 날개 꺾인 지수형 보험
지수형 항공기 지연보험, 해외여행자보험 특약으로 한정 이득금지원칙 들어 중복가입 제한, 관련 상품 개발도 중단
[한국공제보험신문=이재홍 기자] 국내 첫 지수형 보험인 항공기 지연보험의 참조순보험요율이 나왔다. 그런데 이게 혁신의 계기가 될 거란 기대감은 적다. 상법과 상충할 것을 걱정한 금융당국이 여러 제약을 붙이면서, 이를 폭넓게 활용할 길이 요원해진 탓이다.
지수형 보험은 사전에 정한 조건을 만족하면 약정한 보험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보험금 청구를 위해 여러 서류를 준비할 필요가 없는 소비자와 손해조사 절차를 배제할 수 있는 보험사 모두의 편익을 높일 방안으로 기대를 모았다.
항공기 지연보험은 국내에서 지수형 보험으로 개발(참조순보험요율)된 첫 사례다. 항공기 출발이 2시간 이상 지연되는 것부터 2시간은 4만원, 추가 지연 시 시간대별 2만원씩 더해지며 최대 10만원(6시간 이상 지연, 결항 시)을 지급한다.
기존 손해보험사들은 항공기 지연에 관한 실손형 보험을 운영하고 있었다. 항공편이 결항되거나 4시간 이상 지연되는 게 트리거다. 비행이 지연되면서 추가로 발생한 식음료비와 전화비, 숙박비 및 교통비 등을 보험 가입금액 한도 내에서 보상한다.
실손형 보험이기에 보험금 청구를 위해선 증빙서류가 필요하다. 비행 지연에 관한 항공사의 확인증과 비용을 지출한 영수증, 탑승권 사본 등이다. 준비해야 하는 소비자나, 확인해야 하는 손해보험사 모두의 불편을 초래한다는 게 지수형 항공기 지연보험 개발이 추진된 배경이다.
손해보험사들은 기대가 컸다. 지수형 보험은 커지는 수요에도 불구하고 유독 국내에선 발전이 더뎠다. 상법에서 규정하는 손해보험의 실손보상, 초과이득 금지 등의 원칙 때문이다. 업계는 금융당국과 보험개발원의 주도로 지수형 보험이 만들어지면, 여러 보종에 다양한 형태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실제로 손해보험사들은 다양한 활용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지수형 보험 단독 보종 출시를 고려하던 곳도 있었고, 여행사가 비용을 부담하며 소비자에게 혜택으로 제공하는 형태의 단체보험을 염두에 둔 곳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개발된 지수형 보험에 대해서도 같은 문제를 우려한 금융당국은 기존 실손형 보험과의 중복가입을 불허했다. 여기에 해외여행자보험의 특약으로만 가입할 수 있도록 제한하면서 더 이상의 가능성까지 막혔다. 기체 정비 불량이나 오버 부킹 등 항공사의 배상책임을 위한 기업비용보험으로의 활용도 마찬가지다.
결국, 많은 기대를 모았던 지수형 항공기 지연보험은 소비자 개인이 해외여행자보험에 가입할 때 실손형과 비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특약에 그치게 된 셈이다. 이렇게 되면 이번엔 실효성 문제가 대두된다. 지수형 보험의 특징적 단점이기도 한 베이시스 리스크 때문이다.
베이시스 리스크는 쉽게 말해 실제 손실과 보험금의 차이를 의미한다. 손실보다 보험금이 많으면 양(+)의 베이시스 리스크, 반대일 땐 음(-)의 베이시스 리스크가 발생한다. 정해진 트리거에 따라 약정된 보험금을 지급하는 지수형 보험은 이 부분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지수형 보험은 4시간 이상, 6시간 미만 지연 시 8만원을 지급하지만, 손실액이 이를 넘으면 음의 베이시스 리스크가 생긴다. 반대로 복수의 동반자가 각기 지수형 보험에 가입하고 2시간 이상, 4시간 미만의 지연이 발생했을 땐 양의 베이시스 리스크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소비자들의 외면으로 자칫 찻잔 속 태풍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실제 지난 2017년 프랑스 AXA가 출시했던 지수형 항공기 지연보험 역시 시장성 부족으로 2년여 만에 판매 중지 수순을 밟았었다.
손해보험업계에선 논리적 모순이란 비판도 나온다. 지수형 보험 자체가 기존 보험의 틀을 깨는 형태일 수밖에 없는데, 기존 규제에 맞춰 운영하라는 역설이라는 거다. 실손형과 정액형의 중복가입을 막으라는 것도, 그 확인 의무 역시 손해보험사에 주어지면서 손해조사업무가 감소해 보험료가 줄어들 것이란 긍정적 예측도 무색해졌다는 시각이다.